재일교포 4세 문기수씨가 그리는 트라이앵글

한국-북한-일본 잇는 역할 하고 싶어

Damin Jung, 2017년 04월 03일

100년 동안 지켜온 정체성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재일교포 4세 문기수씨는 자신과 가족들이 교토에서 거의 100년 동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기수씨와 같은 재일교포들은 일생에 두 번 국적을 선택하게 된다. 어릴 때는 부모의 선택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 후 19,20살 무렵에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국적을 선택한다. 대한민국 재외국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는 기수씨는 한국 국적을 선택한 경우다.

재일교포 4세 문기수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 국적을 선택한다 | 사진=정다민

하지만 기수 씨가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수 씨와 가족들은 기수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4대에 걸쳐 북한 국적을 유지했고 기수 씨는 북한 계열의 조선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업을 마쳤다.

하지만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겪으며 북한 국적자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수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가족 모두가 대한민국 국적으로 전환했다.

그렇다면 왜 기수 씨의 가족들은 처음부터 한국 국적을 갖지 않았을까? 왜 북한 국적으로 살아남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 무렵까지, 무려 4대에 걸쳐 북한 국적을 유지했던 것일까?

재일교포 구원한 북한

문기수 씨는 재일교포들의 경우 북한 국적을 유지해 온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은 전후 수습만도 버거워 해외 동포들에게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의 도움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북한은 재일교포를 지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수씨의 설명이다.

“북한이 당시에 일본에서 조선은행도 세우고 조선학교도 세웠는데 고등학교는 12개 정도 세워서 재일교포들이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줬어요.”

문기수 씨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국어를 하면서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당시 북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비판하는 마음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한국보다는 북한이 재일교포를 위한 지원에 힘썼다면서 재일교포가 해외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한국 대사관보다는 더 빨리 일을 처리해주는 북한 대사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 사진=위키백과

영어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기수 씨가 고등학교 과정까지 밟았던 조선학교는 북한의 체제 선전 및 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폐쇄적인 학교다. 기수 씨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조선학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었다고 회상한다.

조선학교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 포즈를 취하는 문기수씨(오른쪽), ‘원수님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난간에 걸려 있다(왼쪽 위) | 제공=문기수

이렇게 폐쇄적인 조선학교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어 과목에 회화 수업을 도입했는데 기수씨가 고3이 될 무렵이었다. 영어 공부에 관심이 컸던 기수씨는 영어 선생님의 호의로 졸업 이후로도 선생님과 꾸준히 만나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친구들과 음악 활동을 즐겼던 기수 씨에게 영어 선생님은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할 때 알고 지낸 뮤지션이 있다며 가수 ‘강산에’를 기수씨에게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훗날 기수씨로 하여금 한국행을 결심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학교에서 만난 영어 선생님 John Brewer(왼쪽),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2008년 10월 드디어 오사카항에서 부산항으로 (오른쪽) | 제공=문기수

사실 기수 씨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행보다는 유학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2000)’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 여자친구의 제안으로 한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이 때 영어 선생님에게 소개 받았던 강산에 일행을 만났다. 당시 강산에, 김C 등 락 뮤지션, 인디 뮤지션들과의 만남은 이후 기수 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4년도 시청에서 산에 형(강산에)이 하시는 공연을 보러 갔는데 너무 멋있는 거에요. 그 때 이 사람들한테 음악을 배워야겠다 해서 원래 계획했던 캐나다 유학을 2년 다녀오고 나서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지가 10년이 된 거죠.”

내 룸메는 재일교포

뮤지션의 꿈을 좇아 한국에 온 지 10년째, 그동안 기수 씨는 일어 과외, 카페 점원, 우동집 점원, 통역, 번역, 그림 모델, 베이비시터, 사극 엑스트라 등등 14~5개에 달하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오토바이 타는 것을 좋아했던 기수 씨의 현재 직업은 맥딜리버리 배달원이다.

뮤지션 활동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기수 씨는 그룹 ‘루스터라이드’로 활동할 당시 발표한 노래 ‘괜찮아요’에 나오는 ‘그런 옥탑이면 어때’라는 가사처럼 옥탑에 살게 되었다고 웃었다. 한국에 오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보다 기수 씨를 어렵게 했던 건 재일교포를 외국인 취급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게 한국에 오면서 제가 외국인 취급을 받는 거에요. 제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 국적을 선택 안하고 코리안이라는 국적을 계속 지켜왔잖아요. 특히 4대에 걸쳐 거의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차별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왔는데 제 입장에서 얼마나 자존심, 자부심이 세겠어요.”

기수 씨의 한국 고향은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사진은 기수 씨가 2007년 4월 제사 참석 차 김천에 갔을 당시 찾은 족보(왼쪽)와 친척들(오른쪽, 가장 오른쪽이 기수씨) | 제공=문기수

하지만 한국에서 자신의 꿈을 응원해주고 지원해주는 든든한 ‘형들’, 선배 뮤지션들을 만났다는 기수 씨는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더 이상 차별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 국적 같은 게 사실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같은 지구인인데 (웃음). 언제부턴가 한국인이 나더러 외국인 취급하면 그래 나는 상관 없다, 그렇다고 저 사람이 나보다 잘난 것 없다, ‘내가 더 웃긴데 뭐’ 생각하고 말아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수 씨는 앞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재일교포에 대해, 재일교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알리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게 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앞으로 뮤지션으로서 좀 더 잘 되면서 재일교포에 대해 알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재일교포에 대한 가사를 쓰고 싶고 더 나중에는 제가 겪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 ‘내 룸메는 재일교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고 싶어요.”

평양 공연을 목표로, 기수 씨가 그리는 트라이앵글

기수 씨의 또 다른 목표는 ‘평양 공연’이다. 조선학교 재학 시절 고등학교 수학 여행 차 방문했었던 평양에 이제는 락 뮤지션으로 다시 돌아가 공연을 하는 것이 꿈이다.

조선학교 재학 시절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 기수씨 | 제공=문기수

기수 씨와 가족들이 재일교포로서 일본과 한국에서 이중으로 받는 차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과 일본과 북한, 한국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트라이앵글’ 비전 덕분이었다.

“우리는 이 세 개를 이어주는 역할이라는 자부심으로 차별을 견뎠어요. 대한민국이랑, 일본이랑, 북한을 엮는 역할인 거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기수 씨가 교토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꿋꿋이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웃을 수 있었다고 말해줄 때 느끼는 보람 때문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음악으로 한국, 북한, 일본을 잇고자 하는 기수 씨의 트라이앵글 비전을 응원한다.

 

NK뉴스 영어판 기사 보기

NK뉴스 한국어판 페이스북 페이지 바로가기

NK뉴스 한국어판 트위터 계정 바로가기

메인사진=정다민

대북 관련 소식을 매일 Daily Update를 통해 받아보세요

NK News의 Daily Update를 구독하시고 매일 아침 대북 관련 소식들을 놓치지 마세요